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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잘못된 미즈사키 린타로 추앙에 대해
회의명
제215회-제2차 본회의(2017.05.23 화요일)
의원(질문자)
강민구 의원
답변자
구청장
발언내용
안녕하십니까? 범어동, 황금동의 강민구의원입니다. 전 오늘 2014년 9월에 구정질문한 미즈사키 린타로 부분에 대해 추가로 질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치거나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친일파가 되어 가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 제기는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아픈 과거를 교훈삼아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쓰자는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2014년에 세 가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첫째, 없던 수성못이 미즈사키 린타로에 의해 최초로 축조되었냐는 것이었고 둘째, 이 못을 만든 이유가 조선농민, 소작농을 위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미즈사키 린타로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냐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일제 강점기 36년이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매국적 식민사관이 팽배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친일파 후손이 지난 과거사를 흐지부지하며 버젓이 활동을 하고 현실물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등의 논리로 준엄한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이 새로이 준동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수성못에 대한 고증작업에 들어 갔고 첫 번째의 의문인 수성못은 미즈사키 린타로 외 조선인 4명이 함께 수성못을 축조하기 위한 수성수리조합을 만들고 이를 통해 조합원 436명에 의해 1927년에 수성못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확실한 설입니다.

또한 지나친 공적 찬양을 한 미즈사키 린타로 묘역 부분의 안내판과 수성못 산책로의 안내표식은 일부가 수정되었으나 이 부분은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 부분은 질문 뒷부분에 하나하나 짚어 보겠습니다. 또한 이 구정질문은 자료를 근거로 제 의견을 피력하니 구청장께서는 이견이 있으면 이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전에 충분한 준비시간이 있었고 이런 사실은 굳이 공방이 필요치 않는 역사에 근거해서 고쳐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즈사키 린타로가 추앙되고 추모되어서는 안 되는 사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즈사키 린타로가 추앙된 근거는 딱 2개의 신문기사입니다. 하나는 매일신보1927년 3월 19일자의 경북산업계 소식 기사입니다. (유인물을 들어보임) 유인물의 이 기사입니다. 또 하나는 동아일보 1927년 9월 3일자 전 조선수리조합 실황답사기의 기사입니다.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은 신문사의 성향입니다. 매일신보는 1920년에 창간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서 사시가 내선일체의 신문이었습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민족말살정책을 대변한 신문이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에 협조한 신문입니다. 동아일보에 대한 다른 견해는 그 당시에는 친일성향이 아닌 실제 조선인을 위한 보도를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매일신보와 전반적인 동아일보의 성향으로선 일본인에 대해 미화하고 영웅시 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미즈사키 린타로의 추모식에 구청장이나 구의회 의장이 참석해서는 안 됩니다. 한일친선교류회란 정체불명의 단체가 사적인 일탈을 하더라도 수성구민 46만명을 대표하는 구청장이나 구의회 의장은 미즈사키 린타로의 묘에 참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사내용 참고해 주시고요.

미즈사키 린타로가 누구냐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수성구와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 책자를 제가 참고했습니다. 미즈사키 린타로는 기후현 출신으로 면장 또는 읍장급의 공무원이었습니다. 1915년 치러진 중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합니다. 금권선거로 인해서 가산을 거의 다 탕진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살길을 찾아 조선으로 이주해 옵니다. ‘기슈지’란 친분이 있던 사람이 먼저 대구에 와있었기에 그 인연으로 대구에 옵니다. 개척농민 출신이었습니다. 개척농민이란 일본정부가 조선을 내선일체화하기 위해서 일본인에게 조선으로의 이주를 권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몰수한 땅을 싼값에 일본인 개척농민에게 불하하고 그 땅의 원주인이 소작농민화 되었던 대표적인 우리에겐 폐해가 많은 식민정책이었습니다. 기슈지의 소개로 수성면의 한두 번째 가는 부호인 서수인이란 사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성면 일대의 땅을 사들여 화훼농장을 미즈사키 농원을 운영하고 만주까지 꽃을 수출하며 승승장구합니다. 1921년에는 고추, 사과와 벼까지 재배하며 2정보 즉 6,000평이나 되는 농장의 경영자가 됩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일본개척 농민의 신분을 십분 발휘하여 수완이 좋고 경제이속, 장사속이 대단한 전형적인 상업적 농업경영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수성못 축조에 관여했냐는 부분입니다. 물이 부족해졌습니다. 수성들녘은 이때껏 신천물을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대구부에 많은 일본인이 이주해 오고 인구가 십만에 이르자 신천물을 대구부내 식수로 이용코자 상수도를 냅니다. 이로 인해 수성들에 물이 부족해졌던 겁니다. 이 문제는 미즈사키 린타로에게도 심각했습니다. 화훼농장에 물을 대지 못하면 화훼농사가 큰일 날 일로 자신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였던 것입니다. 수성수리조합 창립을 조선인 4명과 함께 합니다. 진희채, 서상춘, 정재학, 강석회입니다. 수리조합장은 진희채가 하고 부조합장은 미즈사키 린타로가 맡습니다. 조합장인 진희채는 중추원 참의와 도평의원을 지낸 부호입니다. 중추원이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민족운동세력의 분할과 친일세력 육성에 적극 이용된 기관입니다. 중추원 참의는 조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책으로 친일유지나 귀족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진희채는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일명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인 친일귀족입니다. 하지만 서상춘, 정재학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인 414명, 일본인 21명, 프랑스인 1명 합 436명이 참여한 수성수리조합을 만듭니다. 총면적은 370정보(111만평)에 일본인 소유는 40정보(11%)이고, 프랑스(천주교) 소유가 16정보(4%), 조선인 소유가 314정보(85%)였습니다. 조합원 구성이 436명 중 조선인 414명(95%)이란 사실 때문에 다른 식량수탈을 위한 수리조합과는 다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업비는 16만7,000원인데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1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6만2,500원을 차입하고 총독부 1만1,000원, 도청지방비 2만원, 대구부청에서 4만원을 보조받고 합계 7만1,000원. 그런데 당시 기사내용 자료를 보면 9만1,000원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나머지 3만3,500원, 기사내용 9만1,000원이 맞다면 1만3,500원을 조합원이 부담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가장 많은 돈 6만2,500원(37.4%)을 출연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됩니다. 1927년 완공 후 물세를 연간 1반보(300평, 한 마지기)에 2원60전을 균일하게 징수합니다. 그 수입이 연간 9,600원이 되었다고 하니 총공사비를 17년 만에 다 갚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익사업이었습니다. 조합설치 전 1반보에 3석을 수확하던 것이 4석5두로 늘었고 지가가 평균 3할 이상 폭등했다고 합니다. 지주는 엄청난 혜택을 받았던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주들이 물세를 내었는데 그 소작농에겐 소작료를 그대로 받았겠냐는 것이죠. 당연히 물세를 낸 만큼 소작료 또는 다른 방편으로 그만큼을 인상해서 받지 않았을까요? 동아일보 기사내용에는 수세는 전부 지주가 납입하는 제도를 채용하여 수세를 소작농에게 물리는 지주를 조사하는 중이라는 내용도 있지만 글쎄요, 저는 액면 그대로 믿지 못 합니다. 그래서 수성축조를 통해 엄청나게 조선인에게 혜택을 베풀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란 겁니다. 일부 소수 지주에게 혜택이 대부분 돌아갔던 겁니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16만원의 공사비 중 9만원을 토공인부비로 지출해서 관계 면민의 생활을 도왔다고 나옵니다. 토목공사하면서 인건비 지급한 것이 그 지역민을 위한 거였다는 논리는 비약에 비약입니다. 지주뿐만 아니라 그 수혜는 미즈사키 린타로 자신도 엄청 받았습니다. 1년 수세로 8전을 물고 토지가 그렇게밖에 없다는 내용도 기사에 나옵니다. 다른 지주는 300평에 2원60전 내었는데 8전 물었다고 하면 역으로 계산하면 7평밖에 소유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7평밖에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2정보(6,000평)를 소유해서 원래대로 하면 52원을 부담해야 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볼 때 조선농민을 위한 순수한 의도로 수성못을 만든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수리 조합과 차이점은 조선인이 대부분 95%가 참여한 수리조합이라곤 하나결국은 산미증식의 일환이고 그 혜택은 소수의 친일조선인 지주와 일본 개척농민에게 돌아갔던 겁니다. 이견으로 수성수리조합이 분쟁 없이 진행되어 미즈사키 린타로의 치적이 인정된다는 지적도 있지만 의문은 여전히 많습니다. 악덕 부자가 푼돈을 한두 번 적선했더라도 높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설령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의 선행사실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검증에 검증을 거쳐 추앙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939년 임종을 맞아 자신이 죽으면 장례는 조선식으로 하고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는 것으로 그의 애착을 느낄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쫄딱 망해서 조선으로 왔지만 조선 최대의 부호들과 교류하며 여기서 일가를 이루며 번성했습니다.

조선에 묻어달라고 했던 것, 다른 예에서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창씨개명과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을 종용한 많은 친일문인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미즈사키 린타로도 대대손손 이 조선 땅이 자신의 일본 땅일 거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미즈사키의 꿈, 대륙을 향한 꿈이 아니었을까요?

미즈사키 린타로 묘역의 문제점입니다. 비문에 적힌 대로 말씀드리면 1999년 4월 5일 이장을 하고 현창비를 세웁니다. 현창이라면 ‘업적이 길이 빛났다’란 뜻입니다. 이 비문 자체가 당연히 문제가 됩니다. 이 비문의 제문은 일본 동대사장로(지주)인 청수공조가 썼습니다. 건립한 사람은 서창교란 분이고 한일친선교류회장을 지냈습니다. 2000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오등서보장이란 지사급이 받는 훈장도 받았고, 2001년엔 훈장을 받았다고 묘지 옆에 기념식수도 해 놓았습니다. 미즈사키 린타로가 수성면에 왔을 때 도움을 준 서수인의 친척인 듯합니다. 이 분은 자신과 부인이 죽으면 화장해서 유골을 미즈사키 묘지 부근에 뿌려달라는 유언도 합니다. 비문에는 또 김재경이란 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지 기증자는 서수인이고, 그의 아들과 손자손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1999년 역사적인 근거가 빈약한 이 묘를 대대적으로 이장하고 대구 유일의 일본인 묘라고 칭송합니다. 이 일을 추진한 단체가 1기회입니다. 1기회는 일본인도 회원이 많은 듯합니다. 당시 이를 주도한 사람은 오재희 전 주일대사, 문희갑 전 대구시장, 김규택 전 수성구청장, 이병욱 수성구의원, 김태인, 최경주, 박순국 1기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회원 10여 명이 주도했다곤 하고 그 명단은 알 수 없다고 하는 1기회는 뭐고, 한일친선교류회란 단체는 당최 어떤 단체인지 궁금합니다.

안내판 표식이나 글자의 오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미즈사키 린타로 묘역 부분입니다. ‘수성못을 축조한 수기임태랑묘역’이란 안내판입니다. 이 글자를 그대로 읽으면 수성못을 혼자 자신의 사비로 만든 것처럼 오독됩니다. 전 없애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역사라서 계속 세워놓고 싶다면 수기임태랑묘라고 담담히 표시만 해야 됩니다. 묘역이란 넓은 의미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입구 도로 가로등의 150m 표식등을 포함해서 모두 바꾸어야 합니다. 조합장을 지낸 진희채묘에 수성못을 축조한 진희채라고 쓸 수 없듯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묘 앞 안내표식의 제목도 수기임태랑묘라고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 부분 또한 현재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수성못 축조의 혜택이 소수 친일지주에게만 돌아갔다, 식량수탈의 목적도 있었다는 것도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현창비 제막식 사록기 사진 부분의 추도 식 장면도 없애야 합니다. 추도나 추모란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수성못 상화동산 쪽의 진입로 안내판도 수정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수기임태랑에 관한 부분을 삭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인 4명 중 반민특위에 체포될 정도의 악독한 친일인사가 있었고 수기임태랑만 표기한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농어촌공사의 취수탑 안내판처럼 1927년에 축조되었다는 사실만 기록해도 충분합니다. 바로 앞의 커다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이상화 시비 앞이라는 것에서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한 2012년 65억원이 소요된 대대적인 공사로 지금은 수성못이 대구의 으뜸상징이 되었는데 이런 공간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수성못 산책로 이상화 시인 등신대가 있는 쉼터에 수기임태랑 안내판은 없애야 합니다. ‘수성못의 물’이란 안내판 밑에 굳이 수기임태랑에 대한 안내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에서도 수성못을 축조한 수기임태랑 미즈사키 린타로는 ‘수성못 축조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중략〜) 수성못 남쪽에 안장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화 시인의 등신대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면전에서 또한 1926년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구가 너무나 무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계속 수성구청 차원에서 추모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2014년 9월 구정질문에서 구청장, 구의회 의장은 미즈사키 린타로 추모식에 참석을 유보해 달라고 했고, 작년엔 참석하면 안 된다고 여기 이 자리에서 얘기했습니다. 지난 4월 7일 금요일 수성못 축조 90주년 기념 추모식 행사일정이 구청장 일정에도 없었고 구의회 의장 일정에도 없었습니다. 뭐가 두려워 대외적으로 알리지도 않는 추모식에 참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일친선교류회의 단체 성격은 3년 전에는 관계부서에서 모른다고 하더니 이번엔 민간교류협력단체로 회원 상호 간의 번영을 도모하고 양국 공익증진을 위한 친선교류를 확대하는 단체라고 알려줍니다. 이동근이란 한의원 경영이사가 현 회장으로 있고, 한일친선교류회 회원은 한국 30명, 일본 40명 합계 70명이 회원이라고 하는데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단체의 초청에 의해 매년 미즈사키 린타로의 추모식에 구청장과 구의회 의장이 참석한다는 겁니다. 민간단체의 행사라고 말하기 전에 구청장과 구의회 의장은 우리 수성구민이 뽑은 대표자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모 정치인이 주일대사관의 자위대 창립행사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비난받는 것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駐부산 일본 총영사와 기후시의회 의장이 왔기에 추모식에 참석했다고 하실 겁니까? 개인 자격으로 참석하셨습니까? 구청장과 구의회 의장은 그렇게 얘기하기에는 답변이 너무 궁색합니다. 참석 자체로 당연히 개인 자격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즈사키 린타로의 고향인 기후시의 인연 때문이라고 하기엔 명분이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기후시와의 인연은 끊어야 합니다. 교류 현황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2014년 1월 범어유치원의 이사장과 故 서창교 회장의 인연 그리고 한일친선교류회의 소개로 범어유치원과 가구야 제2유치원이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유치원은 사립기관으로 구청에서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유치원 규모에서 다른 국가의 유치원과 자매결연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 부분 이해되지 않습니다.
둘째, 작년(2016년) 7월 수성구 대표단에는 구청장과 구의회 의장이 함께 참석합니다. 그것도 한일친선교류회장과 부회장이 동행을 합니다. 더 이상한 것은 이 두 분의 여행경비 전액 256만원을 지원하고 해외교류도시 방문여비 중 민간인 국외여비 지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 단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 또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셋째, 작년(2016년) 12월 사립유치원이 아니라 가노초등학교 대표단이 우리 공립기관인 동산초등학교 간 학생교류 추진을 협의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완전히 미즈사키 린타로에 대한 과거사는 무시하고 교류의 촉매체로만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본격적인 교류를 할 계획이라는 걸 나타냅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제 미즈사키 린타로의 고향인 기후시와의 인연은 끊어야 합니다. 제가 2014년 8월 초부터 미즈사키 린타로의 문제점을 언론을 통해 다루었고 매일신문이다, TBC뉴스를 통해 수성못 축조, 일본인 공적과장, 주객전도... 뒷전으로 밀려난 이상화 시비란 타이틀로 보도도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타 신문사 보도도 더 있습니다. 물론 지난 4월 7일 90주기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잘못이라는 대구MBC뉴스, MBN뉴스 보도도 있었습니다. 2014년 9월에 이 문제에 대해 구정질문을 했고 미즈사키 린타로의 공적에 대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한데 상기 교류 현황을 보면 2014년부터 교류가 대폭적으로 늘어나고, 구청장께서는 2014년 8월에 당시 논란이 시작되었는데도 기후시를 방문합니다. 물론 외교상 사전에 약속한 사실을 파기할 수 없었겠다 싶습니다. 기후시는 인구 42만명으로 수성구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하지만 방일해서는 시장이 아니고 부시장을 만났습니다. 외교관례상 격이 맞지 않는 데도 격을 낮추어서 면담을 한 것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렇게 급박한 일이 있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여튼 미즈사키 린타로에 대한 잘못된 추앙을 기정사실화하고 일을 계속 추진합니다. 관광 활성화 차원이란 얕은 측면에서 민족의 뼈아픈 과거는 뒷전으로 미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영혼을 팔아서 장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잃은 땅이고 어떻게 되찾은 땅인데 한낱 목전의 이익에 목매여 이런 행정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안드립니다. 기후시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기후시는 미즈사키 린타로의 고향이라고 매개가 되어 교류가 추진된 것 아닙니까? 미즈사키 린타로가 열거한 바와 같이 대단하게 우리 조선의 농민에게 혜택을 준 것이 아님이 나타났으므로 이 시간부로 그 근본뿌리인 기후시와의 인연은 모두 단절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자매결연도시 체결을 예정하고 있다는데 원천무효 처리가 마땅합니다. 일본과 교류가 필요하다면 다른 도시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수성구에서도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만큼 진행되었는데 이제 와서 곤란하지 않느냐고 하면 안 됩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으면 돌아나와 새롭게 길을 걷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의 이익만을 챙기는 얕은 안목은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발전의 길로 가는 혜안이 아닙니다. 이제 그만 미즈사키 린타로 묘가 일본인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되었다고 말하시면 안 됩니다. 어렵지만 다른 방법을 지금부터라도 찾아봐야 합니다. 수성들녘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우리 할배·할매가 한 분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일본 관계는 위안부 합의 문제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다, 독도 문제 등으로 해서 원만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화가 민족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이나 친일세력이 잔존하는 듯합니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치밀한 계획이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속설에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잘 산다”란 말이 있습니다. 한국일보가 2015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모임인 광복회 회원 6,831명 중 응답한 1,1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그렇습니다. 독립운동가 월 개별소득은 75.2%가 200만원 미만이었습니다. 특히 200만원 미만 구간에 본인 38.4%보다 자녀 72.2%와 손자 79.2%, 증손자녀 62.2%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학력도 고졸이 가장 많은 25.7%이고 스스로 하층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73.7%로 나타났습니다. 친일 후손들이 대를 이어 부와 명예를 누리고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보내는 현실과 사뭇 엇갈린 삶이라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우리 대구경북은 국가에서 인정한 독립유공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이란 사실을 여러분들께서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지난 2년간 국외연수를 만주 항일 유적지만을 다녀왔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의 삶은 참으로 비통했지만 나라를 찾으려는 일념은 어떤 고난에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보고 체감했습니다. 그래서 제 맘이 이토록 비감하고 굳건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너무 쉽게 과장되고 왜곡된 역사를 수용했지는 않나 반성을 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얘기만 해서 뭐하냐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수정하고 난 뒤 그 아픔을 발판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계획을 수립해야 보다 튼튼하고 건실한 지방자치단체와 나라가 되질 않겠습니까?
역사 바로 세우기와 이를 토대로 미래로 나아가는데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셨으면 진심으로 고맙겠습니다. 이 관련 부서를 보니까 우리 구청에서는 문화체육과, 관광과, 홍보소통과가 특히 해당됩니다. 제가 구정질문한 내용을 명심해 주셔서 이런 것을 구정 행정에 적극 참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내용
담당부서
홍보소통과, 관광과
평소 존경하는 강민구의원님께서 수성못의 역사와 관련된 미즈사키 린타로에 대해서 광범위한 자료와 인식 또 의원님께서 가지고 계신 애국심에 대해서 존경을 표하면서 의견을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리고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수성못의 미즈사키 린타로와 관련해서 묘역과 1기회와 한일친선교류협회에 대해서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즈사키 린타로 묘는 1999년에 도로 개설에 따라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고, 그 당시 1기회에서 묘를 이장하고 현창비를 건립하는데 주도하였고 말씀하신대로 그 당시 시장과 구청장 등이 참석한 바 있습니다. 이 부분은 故 서창교, 미즈사키 린타로와 함께 활동했던 분의 친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분이 관련되어 있고 또 그분이 설립한 한일친선교류협회가 그 이후에 활동을 했습니다. 현재 1999년에 설립한 한일친선교류협희는 현재 회원 수는 7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설립목적은 회원 상호 간 친목과 번영을 도모하고 권익을 신장하며 양국 간의 공익 증진과 친선교류의 확대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14년 의원님께서 구정질문을 하고 말씀하신 이후에 미즈사키 린타로의 활동에 대한 검증이라고 할까, 수성못 전체에 대한 조명 이런 차원에서 스토리텔링 용역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결과를 모아서 지적하신 대로 미즈사키 린타로공이라고 표시했던 표현 등을 비롯해서 일부 정비를 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말씀하신 안내판의 표식과 글자에 대해서, 수정할 용어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의 안내판에 있는 수기임태랑 묘역을 묘로 표시하는 게 맞다, 또 묘 앞에 제목을 수기임태랑 묘로 하는 게 맞다, 그 다음 축조의 혜택이 친일 소수 지주에게만 돌아갔다, 식량수탈의 목적도 있었다라는 내용을 삽입하자, 그 다음 추도식 장면의 사진을 없애는 게 좋겠다 이런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또 하나는 상화동산 쪽 진입로에 있는 안내판에 ‘미즈사키 린타로와 조선인 4명이 주도해 수성못 축조를 위한 수성수리조합 설립’한 부분을 삭제하자, 그 다음에 쉼터의 안내판에 ‘수성못의 물’이라는 안내판 밑의 ‘수성못을 축조한 수기임태랑’에 대한 안내판을 삭제하자, 이런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14년에 실시한 스토리텔링 용역의 고증 등을 거친 검토가 있었고 그 뒤에 역사학자 등이 참석을 했고 의원님들께서도 일부 참석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기임태랑의 활동에 대한 의미라 할까,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의 의견이 모아졌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용역 결과와 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또 역사학자들과도 다시 한 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제안해 주신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전향적으로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하신 미즈사키 린타로 추모제의 참석 여부와 관련해서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9년 묘지를 보수한 이후에 우리 구에서는 매년 추모제에 참석하고 행정지원을 해 왔습니다. 전임 청장님들도 참석을 해 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또 한일교류도 전임 청장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는 말씀도, 기후시와의 관계도 말씀을 드립니다. 역사를 보는 인식이 있겠습니다마는 과거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조명할 때는 그 당시의 여건보다는 현재의 시각이 많이 반영된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혹자는 균형된 시각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말씀하신대로 미래지향적인 그런 방향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 수성못 축조에 관여한 미즈사키린타로의 행동, 행위가 순수하게 조선인들을 위한 특히 소작농들을 위한 행동이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총독부,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정부의 의도는 분명히 수탈의 목적이 있었고 그것을 실행하는 차원도 있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편 수기임태랑의 행위가 악덕한 것이었는지,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일부 동원된 느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자신 개인의 행동이 바로 악덕한 행동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여러 가지 검토된 내용을 볼 때 그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또 그 당시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했고, 그 당시에도 농민들이 농사를 지었고 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농민들이 혜택을 전혀 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현재 수성못의 존재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존재가 그 당시 축조로 인해서 지속돼 왔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 일제의 내선일체 등 식민지 정책, 대국적 식민사관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개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련의 미즈사키 린타로와 관련된 기후시와의 교류와 추도식 참석이 친일적 행동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을 했던 그 당시 독립 운동가들 또 많은 애국지사들의 행동을 존경하고 추앙해 마지않습니다. 또 현재도 광복회 등 보훈단체들의 활동과 그분들의 안전과 복지정책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저는 지원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성원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이상화를 현창하는 사업도 매우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러한 행동이 매국적이라든가 친일적이라는 데 저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추앙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련을 좀 살려가는 것이 정말 좋지 않은 것이냐, 우리나라 현재 상황이 일제시대의 그런 친일파들이 지배하고 있고 그러한 역사관이 우리나라를 아직도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이러한 교류를 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냐 하는 문제 또 추도식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우리 주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일이냐라는 데 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이상화에 대해서도 시문학거리를 만들고, 맞은편에 시화거리도 만들고 또 뜻이 없는 상단공원의 이름을 상화동산으로 명명까지 했습니다. 표지판을 멋지게 달아놓았습니다. 또 상화문학제를 12년째 우리 구에서 하고 있습니다. 수성문화원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현창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더 보강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구민들의 의사가 어떤 것이냐, 또 미래의 방향에 대해서 이것의 확인이 필요하다, 하나의 아이디어로서 미즈사키 린타로 뿐만 아니라 수리조합을 주도한 인사들을 추도하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게 하려니까 한 분은... 한 분이라고 하니까 뭐 합니다. 한 사람은 친일적 행적을 한 사람이라서 어떤 정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방법도 있겠고, 아니면 전체 436명의 조합원들을 추도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고 있고, 우리 구민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도 필요하다, 그 한 방법으로 의회에서 의사를 확인하는 것도 좋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원님들의 전체 의견으로 또는 의회의 결정으로 그러한 주민들의 의사를 대변해 주신다면 저는 기꺼이 거기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일련의 것은 전임 구청장님들로부터 내려온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오히려 우리 독립지사들의, 이상화 같은 시인의 추모나 현창은 훨씬 더 강화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의원님 말씀대로 미즈사키 린타로에 대해서 많이 격하해서 표현하고 있고 더 필요하다면 검토해서 종합적으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의 그런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살려나가고자 하는 데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앞으로 미래방향을 잘 정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